공지사항
2017년도 성주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 성료 2017-09-07

2017년 9월7일(목) 비오던 날씨가 활짝 개인 오전11시, 서애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류진/성주 향교 전교 이갑도/성주 유도회 회장 김상호/성주 담수회 회장 노오문/성주 박약회 회장 진낙동/야은송씨대종회 회장 송준관/의성김씨계봉(천설)공파 안터경목회/의성김씨계봉(천설)공파 안터향우회/야은송씨 감사공종중 종회장 송정근/야은송씨 재구종친회장 송용섭/칠원윤씨칠계군종회(헌민공)중호 윤탁연선생 후원회/경상우수사 서강공 배설장군연구소 소장 배재영/관당공파 배무범장군 후원회/경상우수사 서강공 배설장군 후원회 회장 배한경/성주군 배씨 종친회/성산배씨 김천종친회/성산성주배씨 서암문중 서울종친회 회장 배재권/성산성주배씨 서암공 선무랑공파 고암건 ㈜대성전설 배성민/성산성주배씨 서암문중 대구종친회 회장 배재소/성주군 배씨 청장년회/의병제독 서암공 배덕문선생 후원회 회장 배재소/성산성주배씨 진사공파 대종회 회장 배한동/벽진이씨 대종회장 이헌탁/()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함평노씨 성주문중/의성김씨 성주종친회 김한희/인동장씨 등암공 종중 대표 장병국/영천 의병대장 창대공 정대임장군 후원회/성주문화원장 도일회/학교법인 육주학원 이사장 박병립/장흥임씨 대종회장 임정모/효숙공 후손(김천청년유도) 회장 배연/풍산류씨 대종회 회장 류종묵/인동장씨 개옹공 종중회장 장주석/()학봉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웅대/수원백씨 산음공파 백추선생 후원회 종친회장 백선기/광주이씨 석담공후손종중 종손이병구・회장 이승완/성주청년유도회 회장 김균섭/청주청씨 문목공 대종회장 정안식/한강학연구원 이사장 정재담/해평운씨 오음 운두수공 후원회 회장 윤금영/충목공유홍선생후원회 유완식/충무공이순신장군후원회/청주정씨백곡정곤수선생후원회 정만용/문충공류성룡선생후원회/문경공류운룡선생후원회/목사공박홍장장군 13대주손 박신일/충렬공송상현선생후원회 송정화/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배천조씨문열공조헌선생후원회/문화류씨송호류정·제호류백춘선생후원회/충헌공홍세공선생후원회/합천임란창의기념사업회 회장 유원춘/선산김씨 문간공파판서공종중 임란보존회장 김교언/소헌공김겸선생후원회/삼도공임계영장군 후원회 임행모 등의 화환이 답지한 가운데 500여명의 후원회 및 내외빈이 참석했다.

 

성주문화예술회관 전경

 

성주 후원회 회원들과 수인사

 

성주 배씨 종부와 부인들이 나와 다과를 대접했다.

 

방명을 하고

 

김항곤 성주군수와 인사

 

원근을 막론하고 많이 참석들을 했다.

 

우로부터 김항곤 성주군수,, 배명호 군의회 의장과 군의원들과,

 

좌로부터 류한성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장, 김상동 경북대학교 총장, 부산국제신문 논설고문, 최영훈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좌정힌 가운데

 

정만용 감사의 사회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다 같이 마치고

 

류한성 회장은 개회사에서 "이곳 성주(고령・칠곡포함) 지역은 임진전쟁에서 성주성 복성 전투를 비롯해 역사적 대소사건 들로 점철된 우리 임진란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 역사의 고장 성주(고령・칠곡) 지역에서 개최하는 거국적인 학술대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따듯하게 맞아 주시는 성주군민 여러분과 제정지원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김항곤 성주 군수님과 배재만 성주군의회 의장님・의원님과 나아가 원근 각지에서 왕림하신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성양회 회원님들께서 다 함께 자리하시어 역사의 한 장을 마련하는 고귀하고 엄숙한 자리에서 본회를 대표해서 머리 숙여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회는 임진전쟁 발발 7주갑이 되는 201262일 경북 안동에서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대제전 기념식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걸쳐 전 국민의 성원하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국제학술대회 4회 개최하였고 사제사 9회 봉행했으며 순회특별전을 2회 개최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대제전 행사의 성과물들이 순차적으로 창출되고 있습니다.

한국 국학진흥원의 전시도록 『임진전쟁 그리고 420년의 기록』・전쟁기념관의 전시도록 『420년을 넘어 다시 보는 임진왜란』・『임진란문헌목록Ⅰ・Ⅱ』 21질・『임진란 연구총서』 41질・『임진란 7주갑기념 文化・學術大祭典 DVDⅠ•Ⅱ』・『임진란 사제사 봉행 DVD』를 이미 발행・발간해서 배포했습니다.

작년 825일 경남 창원대학교 대강당에서 개최한 정기총회에서 4년여에 걸쳐 정성을 기울여 작성한 415분 임진란 지도자들의 전 생애 사적을 포괄한 一代記를 수록한 6300쪽에 달하는 71질의 『임진란 위훈록』을 발행해서 전 국민에게 봉정했습니다.

금년 614일 충북 청주에서 개최한 정기총회에서 대구광역시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연속해서 재정지원을 하여 본회가 개최한 전국규모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수록한 『대구지역 임진란사』를 발간해서 봉정했습니다.

내년 전남 순천에서 개최 할 예정인 정기총회에서 본회가 개최한 행사의 기록사진과 전국에 걸쳐 분포된 임진란 지도자들의 유적・유품 내지 기념물들을 빠짐없이 촬영하여 편집한 900쪽이 넘는 『임진란 7주갑 기념 화보집』을 봉정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덧붙여서 정유재란이 발발한 정유년에 처음 개최하는 본회의 17번째 학술대회가 되는 성주학술대회와 1019일에 개최 예정일인 청도학술대회, 연이어 개최하려고 준비 중인 안동학술대회를 포함해서 2015년에 개최한 영천・경주・상주지역 학술대회 2016년에 개최한 구미・봉화・문경지역 학술대회 등 9개에 달하는 경북지역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수록한 가칭 『경상북도 지역 임진란사』 31질을 발간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本會는 2012년에 거행한 임진란 7주갑 기념 文化・學術大祭典에서 개최한 國際學術大會에서 4回에 걸쳐 壬辰亂史에 대해 총론적・거시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2014년부터 壬辰亂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지역을 선정하여 거점별로 학술적으로 조명하여 전체와 부분을 함께 어울러서 체계화시킨 전체의 壬辰亂史내지 韓國史를 올바르게 정립하여 임진란사 연구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한국의 임진란사를 집대성하고저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본회의 구성원들은 임진란 호국선현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업적을 선양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비롯한 각종행사를 통해 임진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정신을 되새겨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어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확립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본 학술대회에서 주제 논문을 발표하시고 토론해주실 학자님들의 노력과 열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아가 축사를 해주실 우리나라 지성을 대표하는 김상동 경북대학교 총장님과 부산 국제신문 박희봉 논설고문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 학술대회를 조직하는데 향도가 되어주신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님과 김기대 고문님, 정재담 회장님, 배재인 전교님과 참가단체 공훈 요약문을 작성하시고 제반준비를 해주시고 점검하시는 등 실질적으로 책임을 다해주신 송용섭 재정운영위원을 비롯한 배윤호・배판곤・백명현 재정운영위원과 성주(고령・칠곡) 지역의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의 참여단체 회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성주군 김상규 과장님, 이명진 계장님, 이진영 주무관님의 노고와 헌신에 감사드리며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매번 빠지지 않고 경향각지에서 왕림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신 본회 단체회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같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1019일 청도군민회관에서 개최 예정인 청도지역 학술대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고 했다.

 

 

김항곤 성주군수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성주지역의 임진란사를 학술적으로 재조명하고 역사적 인물을 널리 알려 성주의 위상을 드높이고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상동 경북대학교 총장은 "2017년도 임진난사 학술대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임진란사에 큰 의미가 있는 성주지역을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위해 발표와 토론을 준비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임진란의 위기 상황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민족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은 성주 지역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무척 중요한 일인 이유입니다.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는 2012년 임진왜란 7주갑을 기념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 2015, 2016년에 연이어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올해 그 결과물인 대구지역 임진난사를 발행하였습니다.

이 책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의 임진난사를 정리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후손들에게 임진란 중 대구지역의 역사는 바르게 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진정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주지역 임진란사 연구를 대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개최하는 이 학술대회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임진란 호국선현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혼과 얼, 이어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더듬어 역사를 밝히는 일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의 미래를 더욱 찬란히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서 이끄는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우리 스스로를 찾아 세우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배명호 군의회 의장은 "성주지역은 칠곡포함해서 배설장군, 제말, 제홍록 장군 등과 60여분 가까운 의병장이 계신 고장으로 자랑 스럽다"고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국제신문 박희봉 논설고문입니다.

  나눠준 자료에 얼마 전에 쓴 칼럼이 들어 있습니다.

대구지역 임란사 발간을 계기로 부산의 기억 상실증에 대해 질타한 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구 경북이 임란사 발굴에 앞장서는 점을 참 부럽게 생각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면 잊혀집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습니다.

  오늘 열리는 임진란사 학술대회는 우리의 뿌리를 밝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그 근본을 알아야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북방의 여러 강대한 민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한데, 우리는 지금 여기 꿋꿋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강인한 의지가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한 자부심,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민족얼,

그런 게 오늘날 우리를 이렇게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을 다시 불러내는 자리입니다.

임란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입니다.

임란 이후 중국과 일본의 정권이 패망했지만 조선은 홀로 건재했습니다.

  임란은 왕조의 전쟁이 아니라 만백성이 떨쳐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전쟁은 보기 드문 전쟁입니다.

  임란의 한 복판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성주의 오늘 학술대회는 400여 년 전 조상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영원히 우리 민족이 존속하게 그 얼과 혼을 다지는 자리입니다.

  오늘 이 학술대회는 이런 기록을 남겨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학술대회를 통해 많은 기록들이 책으로 남겨졌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학술대회 자리가 바로 역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입니다.

  오늘 이 행사는 역사를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420여년 전을 상상하며 오늘 행사를 충분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축전

 

김항곤 성주 군수님과 성주군의회의원 등과 내외빈이 함께 기념 촬영

 

제1주제로 엄진성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임진란기 성주지역(고령칠곡 포함)의 유학과 학맥을 발표했다.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의 독창성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16세기 이전까지 조선 유학은 修身보다는 經世적 성향이 강했다. 실제로 정치, 경제, 법률 등에 있어서는 완숙기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학문의 성격은 입신양명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科學的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는 爲己之學을 지향하는 성리학의 본령과는 명백한 차이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程頤가 제기하고 朱子에서 완성된 성리학은 국가보다는 개인의 수양을 중요시 했고 입신양명이 아닌 道學을 통한 聖人의 學의 완성에 집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6세기는 아직 뚜렷한 道統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학자들을 만나 講習하고 또는 그들에게서 배움을 청하는 講學이 매우 자연스러웠던 시기다. 실제로 16세기 정구, 지산, 여헌의 門人錄을 살펴보면 둘, 셋에 함께 등재된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시간적·공간적 특수성에 따라 임진왜란이 勃發할 당시 활동했던 지역의 儒者들의 학문적 인접성을 살펴본다면 성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鄭球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며 앞선 세대인 이황과 조식의 학문이 간접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상좌우도가 교합되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령·성주 지역의 학풍은 절충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형태를 보였다. 그리고 어느 한쪽에 함몰되거나 傾倒되지 않고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自得的 성향도 살펴 볼 수 있다. 이 연구의 서두에 언급했듯 임진왜란 당시 倡義는 신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목숨도 초개같이 던질 수 있는 殺身成仁의 태도가 견지되어야 한며 그 바탕에는 자발성과 성리학적 신념의 실천의지가 깔려 있어야 한다. 지역마다 그 특징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고령·성주의 儒者의 자발성에는 경상좌우도 즉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태도가 뒷받침 됐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家傳學을 통해 薰習되어 體化된 성리학적인 정신무장도 임진왜란의 倡義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제2주제로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임진란기 성주지역 수령의 전쟁 대처에서 "이 발표는 임진왜란시기(임진왜란~정유재란) 성주 목사들의 전쟁 대처를 검토한 글이다. 임진왜란시기 성주 목사로 재임한 사람은 6명이며, 여기에 가수(假守)로 활동한 정인홍까지 합치면 7명이 된다.

조선 전기 성주는 물산과 인구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은 물론 위아래로 현풍, 개령, 김산, 동서로 고령, 합천, 대구로 이어지는 육로가 성주를 통과하였다. 그래서 성주는 일본군이 북상하는 중심 도로에 놓여 있었다. 그 결과 성주는 1592422일 무렵 일본군의 조기 침입을 받은 이후로 일본군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고 15932월에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임진왜란기 성주는 성주 목사의 입장에서 고려했을 때에 두 가지 측면에서 인상적인 곳이다. 하나는 전쟁 초기 성주에서는 정인홍과 김면 등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 인근에서 활약하면서 성주의 무계 전투나 성주성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낸 점이다. 정인홍은 아예 성주 가목(假牧)으로서 성주에 주둔하면서 활동하였다. 의병장들의 활발한 활동은 여러 측면에서 성주 목사에게 부담감을 주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주에 주둔한 명군의 비중이 경상우도 중에서 가장 높았다는 점이다. 15938월 유정이 이끄는 명군이 성주 팔거영에 주둔하면서 성주는 경상도에서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이 여파로 성주에 감영이 설치되고 이원익은 도체찰사부를 두었다. 정유재란 때에도 성주에는 경상우도 중 가장 많은 명군이 주둔하였다. 이 점은 성주가 군사전략적으로 중요 지역이라는 의미이며, 성주 목사가 더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리라고 짐작하게 한다

임진왜란기 성주 지역은 세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성주의 지리적 성격이다.

둘째, 성주는 정인홍, 김면 등의 영향력이 컸던 곳이다.

셋째, 성주 팔거영이 명군의 핵심 주둔지가 되면서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성주에 경상 감영이 설치되고 도체찰사도 주둔하는 등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성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도 명군이 경상우도 중 가장 많이 주둔하면서 성주는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

 

제3주제로 김성우 대구한의대학교 교수가 임진란기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조선백성들의 생활과 고난 경상도 성주사례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필자는 임진왜란 당시 선산 사족 층의 사망률이 40% 이상이었고, 전후 선산에 정착한 생존자들의 1/3 이상이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피난민이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구미의 한 명문 가문의 족보[선선김씨족보]를 통해 이 시기 가계 단절 비율을 추산하고, 1625(인조 3) 정부의 인구 통계 자료를 검토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선산은 조선시대 서울과 부산을 잇는 1번 국도인 이른바 영남대로상에 위치한 군현이라는 점에서 피해가 특히 컸다. 일본 선발부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이 도로를 따라 신속하게 북상하면서 가장 먼저 점령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주요 군현들은 대구가 420일에 함락된 것을 비롯해서, 인동 422, 선산 43, 상주 25일 등, 전쟁 발발 이래 7~10일 만에 일본군 치하로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의 철수 시기 또한 가장 늦었다. 이 지역 일본군들은 15935월 중순이 되어서야 전격적인 철수가 시작되었다. 선산이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이와 같은 교통적·전략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덕열과 고현은 가공할만한 탐관들이었다. 이들은 전쟁 준비를 빌미로 백성들에게서 부당한 부세를 매기고, 백성들을 각종 잡역에 동원시켰다. 전쟁 전후 시기 성주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장현광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목사 이덕열에 대한 그의 평가이다.

  성주 목사 李德悅은 (築城을 비롯한) 토목공사에 전념했고, 가혹하게 부역에 동원시켰다. 이 때문에 전쟁 이전부터도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축성역을 독려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에야 토목공사를 중지했는데, 성주 백성들은 그를 아주 원망했다.” 

武官인 그는 탐욕을 부리는 데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극진하게 섬겨, 교묘히 명예를 얻는 것에만 힘을 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판관까지 되었다. 성주 부임 이후 백성들의 고혈을 벗기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자그마한 이익도 모두 챙겼다. 이로 인해 온 고을 백성들이 모두 집과 전답을 버리고 이웃 고을로 피신했다.”

  지방관들이 이렇게 앞장서서 부정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吏胥들도 때를 만났다. 부세 업무가 많아지게 되면, 이들이 활동할 공간이 그만큼 넓어지기 때문이었다. 군인 차출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들, 각종 부세 징수나 잡역 동원에서 빠져나가려는 백성들은 경쟁이나 하듯 이들에게 뇌물을 건넸다.고 했다."

 

제4주제로 임진란기 서강(西岡) 배설(裵楔) 장군의 활약상에 관한 연구는 김인호 동의대학교 인문사회과대학 사학과 교수가 발표했다.

"조정의 공식 기록인 『선조실록』에서는 배설을 원종 1등공신으로 추앙하면서도 대부분의 문집, 관찬 역사서, 이후 근대 소설류에 이르기까지 배설은 칠천량과 명량의 도망자였다. 진보적인 이이화조차도 배설이 도망하자 칠천량의 조선수군의 붕괴한 것처럼 쓰고 있는데 모든 칠천량 패전의 책임은 두 번의 도주한 배설에게 돌리는 정서는 임란 이후 지속적으로 배설이미지의 핵심이었다.

본 연구는 배설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글이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서에서 배설은 심약하고, 배멀미하고, 원균이나 김면과 같은 주장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독단적이며, 재물을 탐하고, 겁이 많아 적과 싸우기 거부하며, 아군은 죽어도 자기만 살아남겠다고 도망한 파렴치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특히 『亂中日記』나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더욱 그러하며, 『명량』이라는 영화에선 거북선을 태우고 도망한 인물로 왜곡하였다. 급기야 대중적 흥미를 위해 혹은 국뽕연예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임진왜란 이후 긴 세월 동안 배설에 대한 심각한 인격적 폄훼는 사실로서의 깊은 검증이 있기보다는 각 정치세력의 긴밀한 현재의 목적과 관련되었다. 이러한 부류의 인식론은 실제 사실보다 필요 사실만으로 허구적 실상을 실제인양 유도함으로써 대중이 감당할 수 없는 편견과 오해를 여과 없이 폭증시킨다. 그리고 대중의 환호를 무기로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다른 어떤 역사적 고려도 배제한 채 도망자 배설의 이미지만을 양산하고자 했다. 그래야 다양한 정치적 목적에 맞는 역사 자료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배설이 어떻게 원균보다 더 심각한 인격적 폄훼의 세월을 이어왔으며, 그러한 비난의 뒤에 숨은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검증해야 한다."했다.

결론 : 낡은 체제가 나쁜 배설을 창조한다.

첫째(배설을 어떻게 죽일 것인가?) 배설 처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둘째(나부터 살고보자), ‘배설 비판(밟기)’은 오히려 측근에서 시작하였다.

셋째,(불충 불의의 배설 이미지)

셋째, (배설과 동인은 무능한 한 통속이다. 도주보다는 무능이 문제다)

남인 측 주장 : 첫째,(불가피한 선택), 둘째(패장에서 망장, 패역으로), 셋째,(낡은 체제의 광부들), 넷째(배설은 안까운 인물, 원균에 맞선 용기 있는 지략가), 다섯째(필요에 따라 창조된 배설 밟기의 전통), 여여섯(창조된 손가락질에서 벗어나야)

 

마지막 제5주제로 임진란기 한강학파 임진란 지도자의 항왜 활동에 관한 연구를 김강식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 연구소 HK교수가 발표 햇다.

"조선중기에 경상우도와 전라도의 접점에 자리한 성주 지역은 성리학이 일찍부터 뿌리내려서 사족지배질서가 구축된 선진 지역이었다. 그것은 고려 후기 이후 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었지만, 특히 兩岡으로 불리는 寒岡 鄭逑와 東岡 金宇顒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선진 지역이었던 성주에서 임진란을 당하여 사족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성주의 寒岡學派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성주 지역에 한강학파가 형성되는 과정과 특징을 살펴보고, 임진란 때 정구의 항왜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성주 지역에서 다양한 항왜 활동을 했던 인물들과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 성주 지역은 한강 정구가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선진 지역이었다. 정구의 학문은 이황과 조식을 절충하는 학풍이었다. 정구의 학풍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풍은 제자들에게 다양한 학문적 관심과 실용을 중시하게 하여 임진란 시기에 다양한 항왜 활동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정구 자신도 임진란 시기에 의병 소모, 각종의 대책 마련, 왕가 호위 등의 다양한 항왜 활동을 전개하여 국난극복에 직접 모범을 보였다.

성주 지역에서 의병 등 항왜 화동을 전개한 인물은 諸沫, 裵德文, 鄭崑壽, 朴而絢, 朴而章, 李承, 裵應褧, 鄭仁耆, 金天澤, 裵楔, 金廷龍, 宋遠器, 張鳳翰, 郭慶興, 鄭彦忠, 金德兪, 李陽得, 朴混, 都應雲, 金天渫, 宋光範, 宋遠度, 李彦富 등으로 대부분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 郭再祐, 金沔, 鄭仁弘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임진란 시기에 성주 지역에서 항왜 활동을 전개한 인물은 크게 한강학파와 이외의 인물로 구분할 수 있다. 한강학파로 항왜 활동을 한 인물은 12명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대부분 창의하여 곽재우 의병에 참전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주로 전투에 참가, 군량을 마련하여 지원, 격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한강학파 이외 인사들도 다양한 항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모두 37명이다. 그들의 활동은 창의하여 김면, 곽재우, 정인홍의 휘하애서 활동하거나, 임금을 扈從하거나, 군량을 마련하여 지원하였다."

 

 

종합토론에 들어가 좌장에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류한성 회장, 토론자로 이병훈 영남대학교 초빙교수, 장정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연구원, 구본욱 대구가톨릭대학교 협력교수, 김진만 육군3사관학교 교수, 배한동 경북대학교 명예교수가 참여했다.

 

종합토론을 마치고 학지들과 플로어들과 기념촬영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