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6년 문경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 성료 2016-11-18

 

2016년11월17일 오전10시, 문경 문희아트홀에서 '문경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가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경북도청, 문경시 후원하에 ()임란호국영남충의단보존회 이사장 곽동협, 서초지역세무사회 회장 문명화, 수암공류진선생 후원회, 구전공김중천선생 후원회, 진주강씨가은공기념사업회 회장 강세현, 칠원윤씨칠계군종회(헌민공)윤탁연선생 후원회, 칠원윤씨대종회장 윤종진, 학교법인 육주학원이사장 박병립, 월봉공고인계선생 후원회, 청주정씨대종회 회장 정선진, 청주정씨문목공대종회장 정진화, 청주정씨정간공약포선생종중, 청주정씨백곡정곤수선생후원회 정만용, 개성고씨규재공 종중, 풍산류씨류천파 종중, 풍산류씨류천파화수회장 류홍우, 태촌공고상안선생 후원회, 성재공고상증선생 후원회, 고씨중앙종문회 회장 고남화, ()학봉선생기념사업회, 풍산그룹 회장 류진, 충렬공송상현선생 후원회 송정화, 아세아주식회사 대표이사 고규환, 목사공박홍장장군13대주손 박신일, 인동장씨등암공예천종중 대표 장사언, 한음이덕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명환, ()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 문화류씨송호류정·제호류백춘선생 후원회, 문충공이항복선생 후원회, 용담공임흘선생 후원회, 배천조씨문열공조헌선생 후원회, 충목공류홍선생 후원회, 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문충공류성룡선생 후원회, 문경공류운룡선생 후원회, 부용당공성안의선생 후원회, 충헌공홍세공선생 후원회, 무의공박의장장군 후원회 회장 박동수, 충무공이순신장군 후원회의 화환이 진열되고, 고윤환 문경시장, 경북도청 서원 문화체육관광국장, 국제신문 박희봉 논설고문을 위시하여 각급 기관장과 후원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많은 참석자들이 방명들을 하고 있다.  500여 명이 참석했다.

 

 본회 정만용 감사의 1부 사회를 시작으로

 

입추의 여지없이 참석하여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류한성 회장은 개회사에서 "우리 임진란사 연구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조명해야할 수많은 논제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고장 이곳 문경시에서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가 개최하는 2016년도 壬辰亂史 學術大會를 마무리하는 뜻 깊은 행사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따듯하게 환영해주시는 문경시민 여러분과 재정지원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고윤환 문경시장님과 김지현 문경시의회 의장님・의원님과 각급기관장님들 축사를 해주실 김관용 경북도지사님 이곳 출신 최교일 국회의원님 나아가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원님들께서 다함께 자리를 하시어 임진란관련 연구의 신기원을 수립하는 뜻 깊은 자리에서 본회를 대표해서 임석하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하고

"본회는 주지하다시피 2012년에 거행한 임진란 7주갑기념 문화・학술대제전에서 주제와 지역을 달리하여 임진란사에 대해 총론적으로 접근했으며, 2014년부터는 임진란사에 대해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여러 지역을 선정하여 학술적으로 조명하여 전체의 임진란사를 올바르게 기록하여 임진란사 연구의 정통성을 확립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나 이 제전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 4년여에 걸쳐 정성을 기울여 임란지도자들의 생생한 기록인 71질의 『壬辰亂偉勳錄』을 간행・배포했다"고 했다.

또한 "이와 병행하여 본회가 개최한 각종행사와 단체회원이 보유한 각종 유적・기념물을 빠짐없이 조사・촬영하여 편집한 900페이지에 가까운 『임진란 화보집』을 발간하고 본회가 개최한 모든 행사와 기록들을 빠짐없이 수록한 『임진란 백서』를 간행하려고 박차를 가하고도 있다"고 했다..

"본회는 2014년부터 해를 거듭하면서 지역별 학술대회를 계속해서 개최해 오고 있으며, 그 첫 번째 연구 대상지역으로 대구지역을 선정하여 대구지역에서 20141031일 제1차 대구지역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를 2015년도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를 212일 영천지역・1017일 제2차 대구지역・116일 경주지역・129일 상주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2016년도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를 520일 구미지역, 924일 제3차 대구지역・1012일 봉화지역에서 성황리에 개최했습니다.

오는 1117일 이곳 문경지역에서 뜻 깊은 제16차 학술대회를 마무리하고, 이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미비점들을 보완하여 2017년도 제17차 임진란사 학술대회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타 지역이 갖고 있지 못하는 문경지역의 뿌리를 찾아서 타 지역에 비교우위를 갖는 문경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고 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경상북도 김관용지사께서도 많은 재정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곳 출신 고우현 도부의장께서도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이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2014년부터 금년까지 3개년에 걸쳐 이룩한 학술대회 성과물을 정리하여 가제 『대구지역의 임진란사』 라는 단행본을 간행하여 대구광역시의 문화자산으로 길이 보존하고자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경상북도에서도 대구광역시가 추진하는 문화유산 보존사업을 좋은 선례로 인정하시어 사업을 추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2015년도에 3개 지역에 걸쳐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20163개 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2년에 걸쳐 도합 6개 지역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이룩한 학술대회 성과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가제 『경상북도의 임진란사 연구』 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여, 경상북도의 문화자산으로 길이 보존하는 것이 학문발전은 물론이고 국가의 문화융성 내지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크게 이바지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거점별・지역별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얻어진 성과물들을 체계적・종합적으로 정리하면 한국의 임진란사가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환영사에서 "

"2016년 세밑에서 문경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 개최를 매우 뜻 깊게 생각하며 축하를 드린다"고 말하고.

"평소 임진란에 대한 큰 관심으로, 학술대회를 마련하시고 준비해 주신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류한성 회장님과 오랜시간 동안 문경지역 임진란사를 연구하시고 오늘 발표까지 해주시는 발표자와 토론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는 구국의 역사였으며, 숱한 외침 속에서도 나라를 지켜온 그 정신이야 말로 우리가 세세토록 이어가야할 민족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 그 어느 외침보다 가장 강력하고 고통을 받았던 전란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내면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서애 유성룡 선생처럼 민족적 영웅의 역사도 담겨 있지만, 의병으로 참가한 이름 없는 유생과 민초들이 목숨을 걸고 쓴 역사야 말로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동안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연구가 이루어져 잊혀진 역사를 밝혀내고 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만, 이와는 반대로 지역에서 이루어진 의병의 역사는 아직까지 세상에 드러내질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언급하고, "지역의 역사를 모르는 지역민들이 어떻게 지역을 사랑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반문했다.

"지방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의의를 되살리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지역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간 민초들의 명예를 되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민들을 화합하게 하는 초석이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오늘 문경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는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우리지역의 의병사에 대한 발굴과 정리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도 했다.

"문경지역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의병에 나선 분이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 선생,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선생, 유천(柳川) 류초(柳初) 선생, 성재(省齋) 고상증(高尙曾) 선생, 지곡(芝谷) 신언희(申彦熙) 선생, 칠봉(七峰) 황시간(黃時幹) 선생, 대수헌(大樹軒) 권의중(權義中) 선생, 천연재(天淵齋) 권용중(權用中) 선생, 죽헌(竹軒) 여춘(余春) 선생, 요곡(蓼谷) 채득해(蔡得海) 선생, 윤재(潤齋) 채득강(蔡得江) 선생, 양애(陽崖) 채득호(蔡得湖) 선생 등 12분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켜낸 지역"이라고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때마침 학술대회와 발맞추어 문경시에서는 임진왜란 의병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오늘의 학술적 성과가 기념비 건립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며 앞으로 이를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줄 수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경북도청 서원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역사를 잊은 만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왜군의 거침없는 침공에 경북지역에서 많은 의병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구했다"고 말하고, "문경지역에서도 많으 의병이 봉기했다다"고 강조하고, "지금도 열강에 둘러쌓여 임진란 당시와 비슷헌 현상이라며 선조들이 목숨걸고 지켜낸 희생정신를 본받아 매진하자"자는 말로 축사를 가름했다. 

 

국제신문 박희봉 논설고문은 축사에서 "얼마 전에 부산의 뿌리 찾기라는 주제로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부산의 뿌리는 대단히 모호했으며. 이는 대구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결국 임진왜란 때에야 부산이 알려지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언급하고,. "부산의 뿌리를 거기서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게 글의 주제였다"고 말했다.. "나눠준 유인물에 보시면 제가 쓴 칼럼이 적혀 있으니. 시간 나면 한번 읽어 보길 권했다."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는 얼마 전 임란 공신들에 대한 위훈록을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위훈록 발간은 국가나 광역 지자체 차원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한데 그런 큰 일을 민간 차원에서 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저는 오늘 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갖고 인사말에 갈음할까 합니다. 한국인은 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가 아니라 우리일까요. ‘내 집’, ‘내 나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 ‘우리 나라라고 합니다. ‘우리라는 복수의 낱말을 라는 단수의 뜻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저는 이 우리라는 낱말에 한민족의 정통성이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조들이 우리라는 낱말을 남겨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동체적 문화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에 주목합니다. 우리의 몸과 머리는 만이 아니라 우리로 이뤄져 있다고 봅니다. 오랜 조상 때부터 내려온 기질이 우리 몸의 DNA 속에 저장돼 있습니다.

두뇌는 흔히 의식과 잠재의식, 무의식으로 나눕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의식 세계입니다. 잠재의식은 오랜 시간 동안 선조들이 겪었던 경험과 고민들이 묻혀 있는 의식입니다. 무의식은 수십만 년 전 원시시대부터의 문화가 전승된 것입니다. 그래서 집단 무의식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석기시대의 머리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생활은 현대이지만 두뇌는 원시시대에 머물러 있어 갖가지 부적응 현상을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는 이 잠재의식과 무의식이 조상들이 물려준 우리라는 말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에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격변기입니다. 이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나와 우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모처럼 마련된 오늘 세미나에서 모두들 많은 것을 배워갔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교일 문경 영주 예천 지역 국회의원의 축전을 보내왔다.

 

손태익 이사께서 위훈록 추가 발간 건을 건의하고 있다.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을 해주었다.

 

본회 김양조 제정운영위원의 제2부 사회로 주제 발표가 시작되었다.

 

제1주제로 임란기 문경예천 지역의 유학과 학맥을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이 발표했다.

  이 발표문은 조선 최초의 국제전이자 대규모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시기 문경과 예천 지역의 의병 운동 배경이 되는 유학 정신과 그 학맥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문경과 예천 지역은 퇴계학의 발흥 이후, 퇴계학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문경은 의병운동의 격전지였고, 예천은 많은 의병운동 참여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퇴계학 발흥 이전 문경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단연 홍귀달洪貴達(虛白亭, 1438~1504)과 채수蔡壽(懶齋, 1449~1515), 그리고 홍귀달의 아들 홍언충洪彦忠(寓菴, 1473~1508)을 들 수 있다. 물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황희黃喜(厖村, 1363~1452) 역시 문경의 인물로 볼 수 있다. 황희는 영의정만 18년을 하면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의 문치文治를 열어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승 가운데 한명으로 꼽힌다. 황희 역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롭게 건립되는 과정에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은거하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특히 예천으로 이거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황의 친인척들이 많았다. 예안에서 이거한 대부분은 이황의 친인척으로, 퇴계의 조카나 종조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위주의 연구에 따르면 이황의 조카인 이완李完을 비롯하여 이굉李宏, 이밀李密(이상 퇴계조카), 이종도李宗道, 이열도李閱道, 이충李冲(이상 퇴계 종손자), 이규도李揆道(퇴계재종손), 이영승李令承(퇴계 종질서) 8명이 모두 예안에서 이거했는데, 모두 이황의 친인척이었다.

이에 비해 문경은 서애학파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지역이다. 문경은 상주목의 관할지역이었기 때문에 상주의 문화적 자장 속에 들어 있었다.

황시간黃時幹(七峯, 1558~1642) 역시 류성룡의 문인으로, 특히 류성룡이 그의 시에 대해 극찬할 정도로 문장이 뛰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후 정경세鄭經世(愚伏, 1563~1633), 이준李埈(蒼石, 1560~1635) 등과 직접 향안을 편찬하였고 전식全湜(沙西, 1563~1642)과도 깊게 교유하여, 이후 이들과 더불어 상산사로商山四老로 불렸다.

임진왜란 시기 이 두 지역의 유학은 바로 이러한 전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물론 이 두 지역을 거시적으로 보면 퇴계학의 전파와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차이가 없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학맥의 전개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들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제2주제는 임란기 문경지방의 항왜 활동과 당교전투를 김호종 안동대학교 명예 교수가 발표했다.

문경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영남 지방 전체에서도 영향이 컸던 당교 전투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우선 주현인 상주 고을이 왜적에게 함락 당하자 문경과 상주 지방의 사족들 가운데, 뜻이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에 앞장서서 왜적을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시기는 상주가 왜적에 함락된 직후인데 이 때 의병 창의에 앞장선 문경 고을 사족들을 거론하자면, 대체로 권의중(權義中), 권용중(權用中), 황정간(黃廷幹), 김덕윤(金德潤), 박사명(朴士明), 고상증(高尙曾), 채달원(蔡達遠), 신담(申湛), 고인계(高仁繼), 여춘(余春) 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활과 화살 그리고 세모진 몽둥이 등 왜적을 살상할 무기들을 다수 만들었다. 여기에 더하여 돌을 실은 石車를 산 정상에 두어 비상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당교 부근 여러 고을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이나 진상품 등의 조세를 이곳 조창에 보관했다가 중앙 정부가 있는 도성으로 운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민수용 물품들도 자연히 이 일대에서 거래되어 유통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당교 일대의 편리한 교통은 전란 시에는 군사적으로도 그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방으로 진출하기 편리한 교통상의 유리함은 군사적인 입장에서도 그 효용성을 높이게 마련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당교 부근은 근대이전의 전통사회때는 천혜의 요새지로 유명한 조령과 그렇게 멀지 않았다. 여기에 더하여 주변에는 비옥한 평야가 많아 군량 등의 조달에도 매우 유리하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은 당교 일대에 일부의 병력을 잔류시키면서 전방에 진출한 주력부대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기 문경 지방의 비중문제이다. 문경은 영남에서 수도 한양으로 가는데 있어서, 당시 중요한 길목이자 군사적인 요충지도 많았다. 특히 이 고장의 조령은 기호지방으로 가는 길목인 동시에 천혜의 요새지로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이곳에서 격파해야, 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둘째, 왜군의 문경 침략과 항왜 투쟁에 관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처음 문경을 침범한 것은 상주 북천전투 다음날인 임진년 426일이었다이 고장 요새지에 계속 잔류하면서 여러 가지 악행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이 고장 사족을 비롯한 주민들은 향토를 지키기 위하여 근왕을 표방하면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산북 영순 가은 등 관내 각지에 출몰하는 왜적들을 기습 공격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셋째, 당교의 위상과 당교 전투에 대한 문제이다. 문경 지방 남쪽에 위치한 당교는 삼국시대이래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인 동시에 교통상의 요지였다. 이러한 당교의 위상을 파악한 왜군들은 당교에 상당한 병력을 잔류시켜 후방기지로 활용하면서 문경 등 주변 여러 고을을 침탈하였다. 여기에 피해를 본 경상좌도를 비롯한 여러 고을에서는 관군과 의병을 동원하여 이곳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특히 당교에 인접한 문경 함창 상주 등의 고을은 그 피해가 더욱 컸으므로, 이곳을 자주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3주제로는 임란기 문경지역 개성고씨의 위상과 역할을 차장섭 강원대학교 인문사회 과학대 교수가 발표 했다.

개성고씨는 문경을 대표하는 사족이다. 개성고씨는 조선 초기에 중시조 고말로의 12세손인 고사원(高士原)이 용궁현 왕태(旺泰)로 낙향하면서 대대로 세거하였다. 특히 임란기에 개성고씨는 고상증을 비롯한 고상안, 고인계 등이 지역사회의 리더로써 활동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의병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후에는 복구사업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써 노브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솔선수범하여 실천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임진왜란기 개성고씨의 위상과 역할을 3가지 관점에서 구명하였다. 첫째, 개성고씨의 족적 기반과 학문 활동을 통하여 지역사회에서 개성고씨의 위상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둘째, 고상증의 「용사실기(龍蛇實記)」를 중심으로 개성고씨의 의병활동을 규명하였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복구사업으로 향약을 재정비하고 『농가월령(農家月令)』과 같은 농서의 보급 운동을 통해 농업생산 증대에 노력하는 모습을 분석하였다

개성고씨는 임란기를 전후하여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면서 향촌을 주도하는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문경 입향조인 고사원 이후 지속적으로 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던 개성고씨는 고흥운이 다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흥운(高興雲)은 중종연간에 천거를 통해 주부를 역임한 고윤종(高胤宗)의 아들로 1570(선조 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랑(正郎)과 군수를 역임한 고흥운은 도승지로 추증되고 죽곡사(竹谷祠)에 입향되었다.

고상안(高尙顔)은 호가 태촌(泰村)으로 1553(명종 8) 경상도 용궁현 왕태동에서 아버지 고천우(高天佑)와 어머니 신천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73(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선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환의 찰방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감찰(監察), 예조좌랑과 정랑 등 내직을 거쳐 주로 외직을 많이 역임하였다. 함창, 삼가, 지례, 함양, 울산, 풍기 등 주로 경상도 일대의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한편 고상증(高尙曾)은 고상안의 형으로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지만 임진왜란에 의병에 참여하였다. 고상증(高尙曾)은 부친 고천우(高天祐)에게 가학을 배우고 영순면 오룡리에서 백석(百石) 강제(姜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강제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덕현감 등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郎)이 된 인물이다. 그는 맏아들로써 동생 고상안이 과거에 응시할 때 진목지(眞木池)를 축조하여 왕태리에 있는 논에 물을 대어 수확을 늘림으로써 가세(家勢)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경지역 사족들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국가 및 지역 공동체가 외세에 의해 유린되는 현실을 접하고, 또한 관병의 패퇴로 이의 극복이 국가의 힘을 기다려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자 대대적인 의병활동에 나선 것이다. 특히 개성고씨 가문은 전통적인 유학사상으로 훈도(訓導)되어 있었음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처사(處士)로서 은둔생활을 고집하지 않고 떨쳐 일어나 구국활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충절사상을 구현하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고상증과 고상안은 치병장(治兵將)으로 고인계와 함께 산양의진을 구성하고 곽재우와 연합하면서 경상도 일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산양의진은 별로 크지가 않았지만 서로 아끼고 협조하면서 군기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자기 향촌과 인근 지역에서의 전투는 물론 멀리 떨어진 전투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상증을 비롯한 산양의진은 창녕 화왕산성의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고상안(高尙顔)은 유성룡(柳成龍)에게 편지를 통해 「어왜팔책(禦倭八策)」이라는 방책을 보냈다.

 

점심시간

 

점심을 마치고

 

차도 마시고 오후 주제 발표에 들어갔다.

 

제4주제로는 임란기 문경 지방관의 전쟁 대응을 이선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초빙 교수가 발표했다.

문경이 전란사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는 지리적 위치 외에도 문경현감에 대한 당시 실록기사에서 찾아진다. 당시 문경현감은 신길원(申吉元)이었다. 1592(선조 25) 413일 부산포에 도착하여 동래성을 함락한 후 북상하던 일본군 제1군이 426일에 문경을 침입하자 이들과 전투 중 신길원은 전사하였다.

1592년부터 1599년까지 문경현감을 지낸 인물은 『문경현지』에 따르면 이희급(李希伋최기준(崔琦準한종립(韓宗立김윤명(金允明구계(具棨) 5명이다전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신길원이 문경현감을 맡고 있었다. 신길원은 1592426일에 문경에 침입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신길원이 전사한 후 변혼이 문경현감에 임명된 것은 15929월이었다. 변혼이 문경현감에 임명된 과정은 전란시 수령의 임명절차를 보여주는 단서를 제공한다.

전란기 동안 수령을 임명하는 기준은 지역별 사례별 차이를 감안해야 하겠지만 경상우도의 경우 도내에 현재 있는 사람 가운데 직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었다. 초유사를 거쳐 경상우도 관찰사직을 수행하던 김성일은 이와 같은 두 가지 기준으로 공석인 수령 자리에 새로운 도내 인물을 신속하게 차임하였다. 이후 김성일은 장계를 올려 이들 임명 내용을 알렸고 이후 왕의 정식 승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임명 절차는 변혼의 임명과정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전란기 문경현감에 임명된 인물 중 주목되는 특징은 변혼과 최기준 및 홍함을 볼 때 도내 현재 거주하면서 의병활동 등 군공이 있는 자가 일차적인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한편 이희급의 예에서처럼 도내에 거주하면서 이전에 수령을 역임했던 인물 역시 주된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문경현감은 문경 내에서는 문경 전투와 양산사 전투를 치렀다. 15924월 문경 전투에서는 당시 문경현감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양산사 전투는 일본군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1593년에 있었던 함창 당교 전투는 문경 내에서 있었던 전투는 아니지만 당교가 문경과 인접한 곳에 있었고, 영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문경현감도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5주제는 임진란기 약포정탁의 구국활동과 역사적 의미를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발표했다.

임진란 시기 정탁이 보여주었던 救國活動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李舜臣을 伸救한 일일 것이다. 왕명을 거역한 죄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순신을 살려냄으로써 그가 다시 三道水軍統制使에 제수되고, 鳴梁海戰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궁극에는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여 나라를 다시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란 시기 정탁의 행적이나 주장 등을 검토해 보면, 그는 이순신을 구했을 뿐 만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救國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을 보좌하여 分朝를 사실상 주도하면서 전쟁 초반의 난국을 타개하려 했던 것, 벽제전투 이후 강화협상이 이어지던 국면에서 다양한 時務策을 제시함으로써 復國을 위해 노력했던 것 등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정탁이 보였던 행적 가운데 또한 주목되는 것은 戰亂 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한 그의 평가였다. 조정은 1601년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유공자들을 錄功하했는데 그 가운데는 扈聖功臣이 86, 宣武功臣이 18명으로 호성공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조가 호성공신 가운데 1등이었던 李恒福과 鄭崑壽를 元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자신을 의주까지 扈從하고 명에 가서 請援하는데 애썼던 두 사람을 가장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전란 극복의 원동력으로써 명의 원조를 거론하고, 그것을 강조함으로써―전란 중에 실추되었던 자신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했던―선조의 정치적 목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탁은  공식적인 錄功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인물들의 공로를 부각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조선의 신료 가운데 전란 극복에 공을 세운 인물로 金誠一, 高敬命, 趙憲, 郭再祐, 權慄, 李舜臣 등을 거명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권율은 宣武一等功臣에 녹훈되었는데 비해 金誠一, 高敬命, 趙憲, 郭再祐 등은 어떤 명목의 공신에도 들어가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왜란 초반 招諭使로서, 혹은 의병장으로서 인심을 고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공식적인 녹훈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의 공로를 부각시키려 했던 것은 전란 극복 과정을 바라보는 그의 인식이 객관적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제6주제로 임진란기 문경지역 전쟁통로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이상훈 부경대학교 해양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이 발표했다.

문경 새재[鳥嶺]는 지형적 조건과 사회경제적 위상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세력을 넓히기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것은 삼국사기 삼국사기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3년 조에 “4월 여름철에 雞立嶺도로를 개통하였다는 기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2권29 경상도 문경현 산천조에는 鷄立嶺은 세간에서는 麻骨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지방의 사투리와 비슷하다. 본 고을 북쪽 28리 지점에 있다. 신라 시대의 옛날 길이다.

문경새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역할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로는 通行路로서의 기능이다.

두 번째로 조세 陸運路의 기능이다.

세 번째 기능으로 이 길은 국제적 교통로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으로는 문경 새재는 지형상 주변 일대가 험준하여 일찍부터 방어적인 측면에서 주목되었으니 要衝地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국토를 가로지르는 소백산맥을 관통하여 동남부에서 한양으로 직선으로 관통하는 곳에 있는 문경새재는 일찍이 주목되었다. 삼국시대 이미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의 장이자 발전의 통로로 개척되었으며, 외침이 잦았던 고려시대에도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외침보다는 내륙 陸運의 중요성과 일본 사신의 통로로 활용되었는데, 결국 일본군은 이 당시 습득된 지식을 바탕으로 침공로로 활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승방략에 의해 상주에 집결된 군사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고, 후발 부대가 변변치 못하였고, 문경새재에는 별다른 관방시설이 없어 방어를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2차 전투를 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경과하면서 문경새재에 관문을 설치하였고, 자주 수축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와 신작로 등으로 이 지역을 우회하기 전까지 남과 북을 잇는 간선로의 관방으로 기능을 계속하였다.

 

류한성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장을 좌장으로 종합토론에 들어 갔다.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권삼문 동국문화연구원 연구원,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곽낙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이호준 전 육군사관학교 교수, 나경준 청주시청 학예연구사가 참여앴다.

 

고윤환 문경시장(오른쪽에서 여섯번 째) 등 관계 기관장과 기념 촬영

 

발표자와 토론자 기념 촬영

 

참석자 들과 기념촬영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