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2015년도 영천 임진란 전쟁사 학술대회 2015-02-14


2015년 2월12일(목요일) 오전 10시, 영천청소년수련관에서 충렬공송상현선생후원회 송정화, (사)충렬공제봉고경명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정환담, 충무공이순신장군 후원회, 가악재이축선생후원회회장 이건수, 한음이덕형선생후원회 회장 이명환, 무의공박의장장군후원회 박동수, 목사공박홍장장군후원회 회장 박신일, 청주정씨백곡정곤수선생후원회 정만용, 문충공류성룡선생 후원회, 문경공류운룡선생 후원회, 영천문화원 원장 성영관, (사)학봉선생기념사업회, (사)포은선생숭모사업회 이사장 정연통/임고서원충효문화수련원장 이남철, 영천의병대장 정대임장군 후원회, (사)임란호국영남충의단보존회 이사장 곽동협, 충익공박동량선생 후원회 회장 박철우,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 도건우, 무민공 황진장군 기념사업회, 광주이씨충장공 이광악장군 종손 이광희,  영천의병장 강의공정세아 문중, 경주임란의사추모회 회장 최병수,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고문 박권흠/(사)한국차인연합회 회장 박권흠, 기계유씨 충목공유홍선생 후원회, 성규관유도회 영천지부 회장 조성보, 대구단양우씨 열락당 종중, 육의당 최계종장군 후원회, 정무공 최진립장군 후원회, 능성구씨 대구무태종중, 해주정씨대종친회 회장 정두섭, 진성이씨 대종회 회장 이경락, 동시순국10현의사봉안고천서원보존회장 김종헌, (사)담수회 회장 박연탁, 순국의사노항공(휘 연)선생 보본당보존회장 김소득, 순국의사(남전공 이일장, 추계공 이득룡, 대재공 이득린) 벽진이씨 후원회, 대한사설물유지관리협 경상북도 회장 정해은, 임란공신 안동권씨 판부사덕시공문중, 임란공신 훈련원정 안동권씨 동암응평공문중, 임란공신 안동권씨돈영부첨 동고치렴공문중, 덕은공수문장 박인걸의사문중, 영천향교 전교 손종옥, (사)임란의병한천승첩기념사업회, 곽망우당 기념사업회, 남계공 손응현의사 후원회, 모헌손덕침선생후원회 회장 손종옥, 의암공 권응기선생 문중, 충의공권응수장군 기념사업회, 월암공김호장군 후원회이 화환이 진열된 가운데 후원회 이사 등450여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찬 가운데 '영천지역의 임진란사의 연구'를 대주제로하고 6개의 소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많은 후원회에서 답지한 일부의 화환


영천시 다도회에서도 일찍부터 나와 학술대회에 올 참석자들을 위해  다과를 준비하고 있다.


아침일찍부터 참석하여


시도전을 작성하고 나면 오늘 발표책자와 후원회 명단을 나누눠어 주었다.


200페이지 가까운 발표 책자 표지


식전행사로 영천시조회에서 '한산도가'를 시조창 해주었다.


박상문 상무의 1부 사회로 축전 등을 소개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순국선현들에 대한 묵념을 마치고


 류한성 수석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임진란사에 찬연히 빛나는 역사의 고장 이곳 영천에서 개최하는 영천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학술대회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영천시민여러분들과 재정지원 등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김영석 영천시장님과 권호락 영천시의회 의장님・의원님들 각계의 기관장님들 나아가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원 및 귀빈 여러분께서 자리를 함께 해주시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주신데 대하여 본회를 대표해서 머리 숙여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本會는 2013년 926일 이곳 청소년 수련관에서 김영석 시장님을 비롯해 시의회위원・의장님각급 기관장님들 많은 영천시민들과 더불어 본회임원들과 대의원 여러분들이 임석하신 가운데 2013년 정기총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이 총회에서 본회가 중심이 되어 임진전쟁 시 우리선현들이 실천하신 살신성인의 구국일념의 나라사랑정신을 본받고 되새겨서 이곳 영천을 구국일념의 국가관을 확립시키는 역사교육의 본거지로 가꾸어가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이것이 동인(動因)이 되어 임란유공자 후손들과 영천시 당국・의회・시민 여러분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전 국민이 참여하는 전국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습니다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지시고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고장 영천은 임진전쟁 초기 패전만 거듭하던 우리 조선군이 육지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두어 승전의 계기를 마련하여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승전의 기념탑을 쌓은 우리겨레의 전승지요성지입니다.
 
백사 이항복 상공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승전과 함께 육전에서 쟁취한 통쾌한 승리라고 평가하셨고 서애 류성룡 상공은 『징비록』에서 영천성을 수복함으로써 일본군이 영천성으로부터 도망쳤고 이로 인해 신녕・의흥・의성・안동 등 경상좌도의 군읍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역사적 평가를 하셨습니다.


社團法人 壬辰亂精神文化宣揚會는 2012년 임진전쟁 발발 7周甲을 맞이하여 文化體育觀光部・慶尙北道・安東市가 주최자가 되고 본회가 주관자가 되어 壬辰戰爭 7周甲記念 文化・學術大祭典을 전 국민의 성원 하에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7周甲 行事에서 중핵이 되는 사업이 4회에 걸쳐 개최한 國際學術大會였습니다.
 
이 學術大會에서 壬辰亂史에 대해 총체적・총론적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2014부터 壬辰亂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國內의 거점들을 선정해서 학술적으로 접근하여 全體의 壬辰亂史내지 韓國史가 올바르게 기록되도록 함으로써 壬辰亂史 硏究의 正統性내지 歷史性을 확립하고 져 노력하고 있습니다本會는 그 첫 번째 연구대상지역으로 大邱地域을 선정하여 2014년 10월 31일 大邱地域의 壬辰亂史硏究라는 大主題로 學術大會를 성황리에 마무리하고 연이어 壬辰戰爭時 陸戰에서 최초로 승첩을 거둔 이 곳 永川을 연구대상지역으로 선정하여 永川地域의 壬辰亂史 硏究라는 大主題하에 6個의 小主題로 분과하여 다각적・심층적으로 영천지역의 임란사를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부분적・단편적으로 연구해왔던 영천지역의 임진란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검증을 통해 학계의 동의와 합의를 도출하여 壬辰亂史의 正論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이번 기회에 타 지역이 갖고 있지 못하는 역사성이 입증되어 영천지역이 타 지역에 비교우위를 점해서 타 지역과 차별화되는 영천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고 출발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본 학술대회에서 주제논문을 발표하시고 토론해주실 여러 학자님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 학술대회를 개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시어 재정지원을 해주시고 환영사를 해주실 김영석 시장님과 축사를 해주실 권호락 시의장님의 성원과 지도에 깊이 감사드리고 여러 가지 세심한 배려로 편의를 제공해주시고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시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경향각지에서 왕림하시어 자리를 함께 하신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회원 여러분과 내외귀빈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김영석 시장을 대리해 참석한 김병삼 부시장은 '반갑다"고 인사한 뒤 "오늘 2015년 영천지역을 임진란사 연구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어서 매우 뜻깊고 기쁘게 생각합니다먼저 우리 영천지역 임진란사 연구를 위한 학술대회 개최에 애써주신 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 유한성 수석 부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또한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영천은 충의의 고향입니다삼국시대부터 또 고려 말 정몽준그리고 오늘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는 임진란사 그리고 또 한국 전쟁시 영천전투전부다 우리 영천지역이 충의와 호국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러한 선현들의 부국청정을 바탕으로 지금 영천은 새로운 영천 발전지도가 그려지고 있습니다세계 최고의 병마공원 위치 또 한국 폴리텍 대학이라던 지 한민고라던 지 무수한 교육 여건 인프라 구축이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그래서 우리 영천은 기업과 산업의 중심도시로 새롭게 도약을 하고 있습니다이러한 모든 것이 선율들의 우국청정을 바탕으로 우리 영천 시민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영천 발전에 매진을 하고 있는 결과라고 생각됩니다우리 임진란사 학술대회가 우리 지역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뼈아픈 역사를 재조명하여 3,500여 창의정영군 의병진들의 우국충정을 되새기고 미래를 밝히는 교훈으로 삼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권호락 영천시의회 의장도 " 만나게 되어서 반갑다"고 인사하고 "임진란 최초의 승률을 이룩하고 의병 창의의 횃불이 빛났던 한천전 성첩지가 있는 이곳 영천에서 임진란사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됨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고 했다.
 "사단법인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는 임진전쟁 시 국가를 구한 의병활동에 대한 조선 연구와 학술적 가치 등을 재조명하고 선열들의 충효정신을 후손에 기리 전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로 우리 민족의 고귀한 정신문화 선양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우리 역사 속에서 임진란은 오랜 전쟁으로 국토확장문화재 소실 및 수많은 인명 피해 등 국가적으로 큰 고통과 참담함을 남겼습니다그와 동시에 일본에 대항하여 맞서 싸워 우리 민족의 불굴의 정신이 한 번 더 발휘한 시점이기도 합니다오늘 이 학술대회는 임진란의 이 이상을 슬기롭게 극복한 인물들의 위업을 재조명 하여 시민들에게 공동체 의식 및 충의사상을 보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영천 문화원장 성영락입니다오늘 각지에서 선조님들의 호국이념으로 만세의 생명까지 불사르며 조국을 위해 몸 바치신 임란 충에 대한 정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위대한 정신을 후세에 기리 빛나도록 함께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강성한 의지로 민족의 정체성 문화 공감대 형성 없이 문화의 토대와 내용이 없이는 막연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의지입니다강성하고 굳건한 의지야 말로 앞날을 이루어가는 인간을 가장 위대하게 하는 요소입니다의지는 도덕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의지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고 했습니다도덕을 내세우는 사람은 그 의지의 참 모습을 가추어내는 과정에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이 잣대의 글 받아서 우리 선열들의 의지를 마음 한 군데에 채워 넣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랑스러운 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오늘 이 임진란 정신문화 선양회도 임란 충의정신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독창적 애국애족 정신에서 다시 일깨우는 참 모습니다역사적 인식재고와 시대적 사문이라고 하겠습니다오늘 이 행사는 도랑과 가치창출입니다역사를 잃은 국민은 국가가 없습니다왜적을 무찌르는 생사의 부국이념이 선열들의 고귀한 넋이 재조명되고 후세에 정신적 부 차원의 민족사가 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영천의 독립운동사 구한말 의명들의 활동 거점이고 전성기 기점입니다6.25 전란의 최후 본으로 반격의 시작으로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국가를 지켰습니다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6.25전승기념탑도 영천에 세워져 있습니다이 모든 것이 영천의 교통의 요충지요한 시 국가가 어려울 때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전략적인 요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근래에 국민들이 국가 간이 흔들리고 있는 이때에 이 행사는 시대적 요청사며 적절한 때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

정만용 이사가 2부 사회를 진행했다.


참석자들이 열공하는 가운데


제일 먼저 '임진왜란 당시 영천 지역의 유림과 학맥'의 주제로 엄진성 영남대 철학과 외래교수가 발표했다.
"임진왜란 시기 의병의 창의와 활동은 암울하게만 여겨지던 당시의 전황에 바꾸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당시 의병진의 구심점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유학에 뜻을 두고 있는 지역의 儒者들로 이루어졌다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는 유학은 점차 위에서 아래로 확산된 시기였으며, 일반적으로 외부의 사상이 유입되어 현지화 되기까지는 약 2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1592년은 유학적 토대위에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정확히 200년이 되던 해이다우연인지 몰라도 당시 조선 유학은 이황·기대승·율곡 등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에 의해 주자학이 새롭게 응용하고 발전시던 시기였으며 또 사림(士林)의 노력으로 의해 서민들의 삶 속에 유학적 정신이 자리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된 창의의병들의 성격은 오직 영천지역에서 국한된 것이 아닌 임진왜란 당시 창의했던 모든 유림의 공통된 특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으로 소위 퇴계학맥의 변두리라 불리던 영천지역이 이미 의병운동의 실천적 동력을 가질 만큼 상당한 정도의 유학적 수준 올랐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공자 이래로 유학은 무엇보다 실천을 중요시 여겼으며 형식 보다 그 바탕에 깔린 심리원칙 즉 자발적인 감정을 중요시 여겼다"했다.

두 번 째 발표로 "임진왜란기 영천 지역의 상황과 수령의 전쟁 대처"를 정해은 학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발표했다. "오늘날 임진왜란 연구에서 영천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 편이다. 1592년 7월 영천성 전투는 조선군이 육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 좌도에 퍼져있던 일본군들의 상승세를 좌절시키고 안강에서 의흥상주로 연결되는 일본군 보급로에 큰 타격을 주었다그리고 이 전투가 1592년 9월 경주성 탈환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데에 큰 이견이 없다"고했다. 
 "그럼에도 임진왜란기 영천에 대한 연구는 몇 가지 측면에서 더 규명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 첫째, 임진왜란기 영천에 대한 연구는 영천성 전투 이후 영천 지역의 전황과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때에 종합적인 조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천성 전투 이후 영천 지역의 전황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여전히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의병대장들을 위주로 이들이 영천성 전투 이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연보를 이용해 간략하게 정리한 정도다. 
 둘째, 이런 측면에서 정유재란 당시 영천의 전황과 지역 상황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영천성 전투를 전후하여 영천의 지리적 이점이 주로 부각된 편인데, 발표가가 파악하기에 영천의 지리적 이점과 중요성은 정유재란 때에 더 중시되었다고 보여 진다. 영천은 정유재란 때에 명 군대가 주로 주둔한 안동과 대구로부터 경주·울산 방면으로 가기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고, 영천·신녕에도 대규모의 명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전 기간 동안 영천군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정유재란까지 살필 필요가 있다. 
 셋째, 임진왜란기 영천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위해서는 수령과 관군에 대한 관심도 함께 가질 필요가 있다. 영천성 전투 당시 경상좌병사 박진을 비롯해 임진왜란기 영천 군수와 관군의 활동은 영천 지역을 다각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재 영천성 전투 당시 영천 군수에 대해서는 도망갔다는 평가만 있을 뿐이다. 또 임진왜란기 영천군에 누가 군수로 부임하여 어떤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임진왜란기 영천에 대한 이해는 1592년 7월 영천성 전투에서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영천에 대한 이해를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영천 지역 전체로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 보았다.


세번째로 "임란초기 영천지역 의병 항쟁과 永川城 復城"의 주제로 이욱 순천대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영천은 교통의 요지였다영천을 중심으로 할 때 동쪽은 毛良을 거쳐 경주부로남쪽은 押梁을 거쳐 청도와 대구 방면으로서쪽은 신녕을 거쳐 安溪상주 방면으로또 신녕에서 의흥안동 방면으로북쪽은 청송 방면으로 가는그야말로 사통팔달의 요지였다. 때문에 조선 정부가 1591년 통신사의 보고로 일본의 침입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경상도의 국방을 강화할 때 영천에도 새롭게 성을 쌓았다. 이때 쌓은 성은 둘레가 1,902척이고 안에 우물이 세 개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축성은 효과는 많지 않고민심만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영천은 경상도의 중로에 위치하면서 경주에서 안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때문에 영천을 점령한 가등청정 부대는1,000명의 부대를 잔류시켜 영천을 확보하고자 하였다이들 잔류부대는 주요 교통로를 오가면서 침략을 자행하였다일본군의 침탈이 자행되면서향토방위차원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영천과 신녕에서는 정세아정대임권응수 등이 거주지를 근거로 의병을 일으켰다그들은 초기에는 노략질에 나선 소수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수준의 활동을 하였다그리고 그마저도 관군 지휘부와의 알력으로 인해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의병대장 임명을 통한 지휘 체계의 확보명군의 참전으로 인한 전황의 변화몇 차례의 전투 승리를 통한 사기 고조 등은 점차 이들의 활동 영역과 성격을 달리하게 하였다영천과 신녕그리고 의흥 등 인접 군현의 의병부대가 연합 전선을 형성해 진행한 박연전투의 승리는 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임진란 시기 永川邑城 수복과 이후의 전투 상황을 金康植 한국해양대학교 교수가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으로 불리는 넓은 뜻의 임진왜란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즉 임진왜란 개전기강화회담 시기정유재란 시기로 나눌 수 있다본고에서는 이러한 시기구분에 따라서 임진왜란 전시기에 걸쳐서 전장의 중심이었던 영천지역에서 임진왜란 개전기에 있었던 영천읍성의 수복 전투와 이후의 전투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지금까지 임진왜란 시기의 영천지역에 대한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먼저 임진왜란 시기에 영천지역에서 일어났던 의병운동과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있으며,다음으로 임진왜란 시기에 영천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와 인물을 다룬 연구가 있다이 가운데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영천지역의 전투에 대한 연구는 의병활동을 한 인물에 대한 개별연구, 영천지역에서 활동한 관군의 활약에 대한 연구, 영천읍성의 수복전을 다룬 연구로 구별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임진란 초기에 영천읍성의 수복은 영천의 의병과 군민이 단결하고다른 지역의 의병군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이러한 임진란 최초의 영천읍성 수복은 1592년 7월 평양성 수복이 실패하는 등 陸戰에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고 있던 아군에게 안겨준 커다란 기폭제였다때문에 영천읍성 수복은 수군의 한산도대첩에 비견되는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그리고 영천읍성 수복으로 신령 의흥 안동 등 경상좌도가 회복되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조선군의 군용이 크게 진작되어 경상좌도의 거점인 경주부 읍성 탈환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반면에 일본군은 경상좌도의 요충지를 상실하게 되어 부산 기지의 확보와 부산에서 한성의 보급로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나아가 일본군이 임진왜란에서 패배․후퇴하는 단초가 되었다고 보아진다".
 아무튼 "영천의병은 초기의 독자적인 활동기영천읍성 수복 때의 의병연합군 시기이후 경주성 수복전에서는 관군과 연합하면서 관군화되어 나갔다이러한 영천의병의 변화상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았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동향에서 부주제로 -영천성 전투를 중심으로김경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이 발표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와 전라도충청도에서 활동한 의병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다경상좌도 의병에 대해서는 위의 지역에 비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병 관련 사료의 발굴과 더불어 꾸준히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그러나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연구에서 조선의 의병이 맞서 싸웠던 일본군의 편성체제와 행동양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일본군의 행동양상이 언급되었다고 할지라도 대개 그들의 북상 경로와 개별 전투만을 언급하였을 뿐이다그들이 어떤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는지전투와 후퇴그리고 주둔의 방식은 무엇이었는지 등과 같은 기본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연구는 많지 않았다. 의병활동이 온전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전투 상대였던 일본군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임진왜란 시기 의병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의병이 맞서 싸웠던 일본군에 대한 파악이 필수적이다그러나 현재까지의 의병연구에서는 의병의 상대였던 일본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은 근거에 토대하여 일본군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전투는 상대방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 이 남긴 사료 대한 분석 없이 조선 자료만으로는 전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 어렵다조선의 자료는 시대가 지날수록 전공을 과장하기도 한다는 사실 역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그렇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전공기록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한국의 임진왜란 의병연구가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료 활용과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보다 균형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결어에서 말했다.

 끝으로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를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발표했다.
 "전쟁은 갈등 때문에 일어나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화해한 뒤에야 전쟁이 마무리된다. 일본은 역사상 한국을 900여회 침략했으며, 한국은 너댓 차례 일본을 정벌하였다. 고려시대로 한정한다면 1274년과 1281년에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다가 실패했고, 창왕 2년(1389)에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朴威, ?-1398)가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해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고려인 포로 100여명을 찾아왔다. 
 이 시기에는 일본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일본 자체적으로도 왜구(倭寇)를 통제하지 못했는데, 1350년에 고성(固城)ㆍ죽림(竹林)ㆍ거제(巨濟)에 쳐들어온 왜구는 해적의 수준을 넘어선 정규군 체제였다.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40년 동안 394회나 왜구가 침략했는데, 이것은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큰 것들이고, 규모가 작아서 서술하지 않은 것을 합치면 그 숫자가 더 늘어났을 것이다.이 시기 대일(對日) 전선의 앞에 섰던 인물들이 영천 출신의 최무선(崔茂宣, 1325-1395)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8-1392)이다."
 "임진난의 강화 과정에서 포로를 데려와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생겨 회답겸쇄환사로 시작했지만, 두 나라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4차(1636)부터는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에도막부도 국가의 대표성을 국내외로부터 공인받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통신사를 접대했는데, 중국과 외교가 단절되어 대륙문화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줄어들자 조선 정부에 각 분야의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통신사의 숙소에 일본 전문가들이 찾아와 질문하고 조선 전문가가 답변한 내용이 바로 필담집(筆談集)인데, 선진문화를 읽어보고 싶은 일본 독자와 자신이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일본 문사, 책을 판매하여 이윤을 추구하려는 상업 출판사의 욕구가 맞아떨어져 200여종의 필담창화집이 곧바로 간행되었다.
 필담창화집 가운데 상당수는 한시(漢詩) 창화(唱和)와 문학적인 주제를 다뤘지만, 의학(醫學) 관련 필담창화집도 40여종 출판되었으며, 성리학, 음악, 미술 등의 다양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임진난이 마무리된 200년 이후까지도 한일간의 앙금이 남아 있어,두 나라 문인 사이에 도전적인 필담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200여종 필담창화집 가운데 임진난을 주제로 한 내용만 발췌하여 자료집을 낼 필요가 있다.
 통신사가 파견되기 직전에 의병장 출신의 차관(差官)들이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의 기록도 집대성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의병장들의 일기, 명나라 장수들의 기록, 임진난에 참여한 일본 측의 기록도 전부 수집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기록들을 집대성하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면, 임진난에 대한 연구가 더욱 다양한 각도에서 이뤄지지라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권호락 영천시의회 의장과 영천시 김병삼부시장이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이사들과 기념촬영


 류한성 본회 수석부회장을 좌장으로 종합토론에 들어갔다. 토론자는 권상우(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상훈(해사박물관 기획연구실장), 김형수(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원), 최재호(육군3사관학교 교수), 이상규(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정식 영천대마연구소 소장이 토론을 했다.


플로어 질문에서 손두식 이사가 이번 발표에서 승병에 대해서도 발표했으면 하는 의견을 냈다.


불교미술사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있는 정귀선씨는 17세기 불교사를 공부하면서 승병에 관한 자료와 영천의 은혜사와 백흥암에서도 승병이 일어난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한 자료가 혹시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맨먼저 발표한 논문에 오타가 많은데 신경좀 써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김상조 이사는 영천 출신의 사성당 김완장군의 조명을 부탁했다. 경북 영천 출신인데 불멸의 이순신 대하드라마 등에선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학자들이 바로잡아 작가들이 혼란이 없도록 할 것을 부탁했다.


김성호님은 울산좌병영 등이 있는데 임진란 이전에도성곽이 있었는지 김강식 교수에게 질문 했다.


 김병호 이사는 영천 출신의 화약 발명가 최무선 장군에 대한 연구 논문이 있었나 질의


창대공의 후손 정훈표씨로 임란 의병 당시 한지역에 의병대장이 여럿이 있을 수 있나 질의


종합토론을 마치고 기념촬영